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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인문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을 읽고 나를 읽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는 당연히 사랑 이야기겠거니 했지만 영화 평론을 엮은 책이었다.

평론은 어색하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기우였다.
보지 않은 영화도 본 것처럼 몰입되었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흥미로웠으며 그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어쩜 피력하고자 하는 의견에 필요한 내용을 끌어와서 적절하게 풀어내지?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던 복수극에 이렇게나 깊은 함의가 있을줄이야. 잔인한 영화는 싫다며 고개 돌렸는데 다시 보고싶기도 했다.
영화의 서사를, 인물의 심리를, 그리고 감독의 의도를 신형철스럽게 해석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심오한 세상을 탐구하느라 술술 읽히지 않는 진득한 책이었다.

(보고싶은 영화: 러스트앤 본, 피에타, 다른 나라에서, 우리 선희, 청포도사탕)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책 속에서 신형철의 논리적 사고 체계를 엿볼 수 있었다.
대중적인 연애 서사에서의 ‘태초의 환상 - 환멸의 시간 - 자기의 발견’라는 도식 (p46)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주석 - 해석 - 배치’ 단계를 서서히 밟아가는 일 (p113)
윤리학적 상상력은 ‘사건 - 진실 - 응답’을 서사 내부에 절합하는 것 (p134)


이런 사고 체계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시선으로 영화를, 더 나아가 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조제였을까 쓰네오였을까? 내 사랑은 욕망의 세계에 있을까 사랑의 세계에 있을까?
나의 라이프가드는 무엇이며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윤리적 기차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시선은 어떠한 곳으로 도달하게 되는데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 (p46)
당신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p85)
어떤 일은 겪은 주인공이 그 일이 있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때만 그 일은 사건이 된다는 것 (p115)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떠나 기억을 봉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p183)


책에서는 사랑, 욕망, 윤리, 성장이라는 네 개의 섹터로 그의 시선을 분류했지만 하나로 귀결시켜볼 수 있었다.
결국 타자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를 지혜롭게 조감하고 과감히 홀로 나아가 성장하는 것
이것이 정확하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기 위한 내면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아직 떠오르는 모든 질문에 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선으로 내 삶을 조망함에 있어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신형철과 나의 조용한 독서 모임이었고 또 다른 시선을 품게 되었음에 설렌다.
좋은 이야기는 그것이 끝나는 순간 삶 속에서 계속되므로 (p66)

1. 결여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p20)
 
쓰네오의 대답은 결국 ‘나도 나를 사랑해'가 되고 말았다. 쓰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쓰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쓰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p23)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24)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26)

2. 성장

사랑을 잃고 나는 썼네. 슬퍼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애원하며 썼네. 그러다 알았네 내가 쓴 것들 속에는 오로지 ‘나'뿐이었네. 자기연민, 자기기만, 자기합리화, 자기모멸. 20대 때의 사랑은 나 혼자서 한 것이었네. 나는 그녀를 몰랐고, 그녀를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네. 나는 사랑을 오해했고,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했네. (p37)
 
아나토미를 위해 필요한 제3의 시선, 즉 사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그리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 사랑에 빠진자와 거리를 두고 이를 관찰하는 그 제3의 인물을 (알랭드 보통의 별명을 빌려) ‘닥터러브'라고 하자.(p42)
 
“그러니 이제는 환멸의 시간이다. 나는 그제야 나의 무지를 깨닫고 타자를 알고자 하는 욕구로 불타오른다. 우리의 그녀는 절치부심, 불철주야, 동분서주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별은 이렇게 독이면서 약이다. 질 나쁜 연애소설은 연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연애(또 다른 타자, 반복되는 환상)로 봉합하지만, 괜찮은 연애 소설은 같은 문제를 이렇게 자기 발견(또 다른 나, 성숙한 환멸)의 형식으로 해결한다.”([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682~683쪽) 이것이 대중적인 연애 서사의 일반문법이라고 생각하며 썼다. 요컨데 ‘태초의 환상 - 환멸의 시간 - 자기의 발견'이라는 도식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p46)

3. 사랑

“사랑하는 것과 익숙해지는 것은 달라요. 엄마도 나를 익숙하게 여기기는 하잖아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게 16년 동안 익숙해졌을 뿐이었던 에바는 자신이 한 번도 케빈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  편지를 받고서야 깨닫게 된다. (p54)

 

우리는 이 부부에게 가장 가까운 조재일 딸조차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김희상 옮김, 산책자, 2010, 26쪽)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누구도 들춰 볼 수 없는 장막이 가려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르주와 안느의 ‘인생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p62)

 

“그 말에는 사랑은 그 나름의 기준을 만든다는 사랑의 기적이 담겨 있다. 즉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대하는지 사랑 없이 대하는지가 즉각적으로 명백해진다.”(슬라보예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2006, 127쪽) (p65)

 

어머니라는 존재의 본질(그런 게 있다면)은 그와 같은 ‘순간적인' 시험을 통과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증명해주는 사랑의 지구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던가. (p74)

 

‘피해자가 복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그 고리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 복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 영혼의 도약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구약의 메시지를 신약은 이렇게 뒤집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복음 5장 38~39절) (p77)

4. 불안과 안정

그리고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차례로 스님과 라이프가드가 등장할 것이다. 당신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것,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안느는 분명히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고 마침내 외출을 감행한다.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려고 합니다.” (p85)

 

‘시간과 공간'이라는 숙명 위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완전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 그래서 ‘모든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다. (p86)

 

그의 영화에는 ‘라이트하우스'가 없는 삶을 지혜롭게 조감하는 시선이 있고 ‘라이프가드'를 찾아 헤메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다. … ‘비가 오고 우리는 춥다, 생의 등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라이트하우스가 없는 세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라이프가드가 되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이름은 이 세 안느의 이름 중 하나와 같다. (p88)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선희의 물음은 리어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말해보아라, 나의 남자들아! 누가 나를 가장 욕망한다 말하겠느냐?” 이렇게 바꿔 묻는 순간 우리에게 타자의 인정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가 또렷해진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지 말해달라고. 그런데 타자의 말이라는 것, 믿어도 되는 것일까? 타자라는 존재들은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기는커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p96)

 

그들은 자신이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또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욕망과 관련해서 말들은 실패하면서 성공하는데, 그 지긋지긋하면서도 정겨운 순간들에서 같은 노래(<고향>)가 세 번 흘러나올 때, 그 노래는 ‘다 그런 거다, 어쩌겠는가,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그때 이 영화는 ‘말은 인간의 못난 숙명이지만 그 말들 속에서도 때로는 봄날의 창경궁처러머 고요한 날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인간을 다독이는 현자의 우화처럼 보인다. (p97)

 

그러나 낙관적 다짐(‘되어야 한다!')이 강박적 불안(‘될 수 있을까?’)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은 병리적이다. (p115)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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